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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철학적 분석: "냄새는 선을 넘지 못한다"는 잔인한 진실에 대하여

by cdh9100 2025. 11. 17.

영화 기생충 일러스트 이미지

 

영화관을 나오며 무의식적으로 제 옷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아마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그만큼 지독하고, 불편하며, 그래서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싸움인 줄 알았던 이 영화는, 사실 우리 사회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계급의 냄새'를 끄집어냅니다. "부자들은 착해, 구김살이 없어"라는 대사 앞에서 묘한 박탈감을 느꼈던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영화 리뷰가 아닙니다. 반지하 냄새가 밴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서로 기생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서늘한 고찰입니다. 오늘 저는 실존주의와 계급론을 빌려, 이 불편한 걸작을 다시 한번 해부해 보려 합니다.

실존주의 관점에서 본 기생충

특히 기택이 박 사장을 찌르는 순간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존재를 부정당한 한 인간의 처절한 비명이었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들은 모두 실존적 불안 속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김기택 가족은 자신들이 처한 반지하 공간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정규직도 없고, 안정된 삶도 없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이 없고, 오직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정의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김기택 가족에게 적용해 보면, 그들은 무기력하고 방향성 없는 상태에서 사회 속 의미를 찾으려 몸부림칩니다.

김기우가 위조된 서류로 박가에 입성하는 순간, 그들의 실존은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그것은 비록 거짓된 신분이지만, 자신들의 존재를 변화시키려는 선택이자 실존의 첫 행위입니다. 사르트르의 시선에서 본다면, 이는 책임 있는 인간의 선택이며, 존재를 본질보다 앞세우는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국 타인의 삶을 침범하며, 타인에 의해 규정된 존재로 다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와도 연결됩니다. 또한 영화 후반부, 기택이 박사장을 살해하는 장면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의 극단에서의 자기 선언입니다. 타인의 냄새에 의해 ‘존재’를 부정당한 그는, 폭력을 통해 자본주의 상위 계층의 가면을 벗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해방이 아니라 더 깊은 지하로의 추락입니다. 그는 지하실에서 도피적 실존을 선택하며, 타자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실존의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자기부정 속으로 사라지는 현대인의 초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계급 구조 속 인간의 위치

반지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취객의 노상방뇨 장면은, 이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오물을 받아내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기생충’은 계급 문제를 그린 영화 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이고도 철학적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공간적 상징을 통해 계층 구도를 설계한 방식은 탁월합니다. 반지하 집은 햇빛의 반만 들어오고, 상하수도에서 흘러나오는 악취가 머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닌, 사회 구조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김가족이 위조된 신분으로 점차 박가의 공간을 잠식해 가는 과정은 일종의 ‘계급 상승 시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상승은 본질적으로 허위이며, 착취의 반복 구조 속에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김가족은 박가의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생존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자신들 또한 또 다른 하층 계급(지하실 속 부부)을 착취하게 됩니다. 이는 계급 사회가 단지 상-하로 나뉜 구조가 아닌, 내부적으로도 경쟁과 억압이 반복되는 피라미드 구조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지하실에서 사는 근세와 문광 부부는 존재 자체가 지워진 계층입니다. 이들은 ‘법적 주소’조차 없는 상태로, 사회 시스템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들입니다. 근세가 박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는 장면은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복종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립니다. 박사장이 가진 권력은 그저 자본력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자본은 노동 착취와 사회적 격차로 이루어진 허구적 권위입니다. 또한, 기택이 끝내 지하실로 내려가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응축한 결말입니다. 그가 택한 도피는 계급 구조를 바꾸지 못했음을 시사하며, 오히려 이 사회 구조 속에서의 저항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욕망의 구조와 파국

우리는 모두 기우처럼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고민해 본 적이 있나요? 영화 ‘기생충’은 단지 계급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갖는 욕망의 본질과 그 욕망이 만들어내는 파국을 철학적으로 조명합니다. 지젝은 영화에 대해 “기생충은 우리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한다”라고 말합니다. 김기우가 박가의 딸을 통해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꿈꾸는 장면은 단순한 연애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계층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더 나은 삶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러나 이 욕망은 자본주의적 환상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실제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박사장의 집을 점거했을 때조차, 그들은 여전히 거짓과 위선으로 서로를 감추고, 내면의 불안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욕망이 커질수록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배척하며, 파멸의 길로 향합니다. 이는 라캉의 욕망 이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라캉은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 했으며, 기생충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타인의 삶을 모방하며 존재를 왜곡해 갑니다. 결국 생일 파티 장면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결말은, 욕망이 한계에 부딪히며 폭력으로 표출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는 구조적 갈등의 해소가 불가능할 때, 인간은 결국 파괴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깨뜨릴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가 기생하는가'가 아니라, '왜 서로 기생하도록 설계된 세계가 만들어졌는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기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집의 구조 '지하실, 반지하, 1층, 2층의 수직구도'는 이미 누구는 위로, 누구는 아래로 살아갈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세계관이었습니다.

영화 '기생충'은 단순한 사회풍자나 블랙코미디 이상의 가치를 지닌 철학적 영화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위치에 있는가’, ‘내 욕망은 진짜 나의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들이 영화 속에서 반복됩니다. 관객은 웃으며 영화를 보다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생충이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철학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이유입니다.